책[candle light]

스크랩]조훈현 에세이

윈터원더랜드 2009. 3. 23. 17:59

벵케이와 삽살이
NO.3   2001-08-10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이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풍신수길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배 밑창에

 실었다.
현해탄을 건널 동안 호랑이가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그들은 개 몇 마리를 먹잇감으로 밑창에 같이

넣어 주었다.
며칠 후 일본에 도착해서 밑창의 우리를 열어보니 호랑이는 온데 간데 없고 개들만 살이 통통하게 쪄

있어 왜군들을 놀라게 했다.
먹이로 넣어준 개들이 오히려 호랑이를 잡아먹어 버린 거였다.
개들의 용맹성에 탄복한 그들은 조선개를 각별히 대접하고 잘 키우는데 그 놈들이 훗날 세계적인 명견

 아키다견(犬)이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일설이 있다.

내가 일본에서 바둑공부를 할 때 유일한 친구가 바로 그 아키다견 벵케이였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온 제자를 고려해서 세고에 선생님께서 일부러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온 것이

었다.
스승의 집에 내제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으므로 나는 무던히도 외로움을 많이 탔던 것 같다.
그런데 벵케이가 등장하자 나의 아침은 완연히 활력이 감돌았다.
정원의 뜨락을 청소하고 난 뒤 삼십 분 정도를 벵케이와 산책을 하곤 했는데 매일 안개 가득한 니시

오기(西荻) 거리를 놈과 함께 헤쳐가다 보니 자연이 정이 들어버렸다.
나보다도 훨씬 성장속도가 빨라 내가 일본을 떠날 때 쯤 벵케이는 귀도 우뚝 솟고 골격이 장대한

성견으로 자라났다.
귀국하기 위해 스승의 집을 나오는 순간 벵케이는 어떤 예감을 품었는지 무척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했고 낮은 신음소리만 냈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내가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스승 세고에 선생이 자살하셨다.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나는 그저 얼떨떨한 표정밖에 짓지 못했다.
무슨 이유로 스승께서 그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 세상과 절연(絶緣)해야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지만 그저 먹먹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애견 벵케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작은 주인인 나를 떠나 보내고 큰 주인마저 잃은 벵케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비실거리더니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벵케이의 사인은 병(病)이었지만 그 놈도 세고에 선생님처럼 자살을 택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찮은 동물이지만 개도 정과 의리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일본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벵케이도 오래 살았을 텐데......

귀국한 뒤로 나는 틈틈이 집 마당에 개를 길렀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개를 키웠는데 평창동으로 이사오면서 야무진 진돗개를

끌고 새벽산책을 하면서 문득문득 니시오카의 벵케이를 연상하곤 했었다.
충성심 강한 진돗개도 맘에 들었지만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벵케이의 무게를 상쇄시켜

주는 놈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워낙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함께 했던 탓일까?
지금은 평창동 집에 삽살개 두 마리(갑돌리,갑순이)를 키우고 있다.
그 놈들이 짝을 맺고 며칠 전에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다.
토종 삽살개라 제법 귀한 품종이라는데 여덟 마리를 다 키울 수는 없으므로 적당히 크면 주변의

 애견가들에게 한 마리씩 분양해줄 생각이다.
물론 개를 가족처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두 딸 승희와 윤선이의 의견을 참작해서 적당한 시기에 삽살개 강아지들을 타이젬의 회원들에게도

몇 마리 분양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