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모 시사월간지로부터 청탁을 받았던 주제인데 원고매수의 제한때문에 충분히 이야기를 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 보강한 내용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느날 갑자기 조선일보의 이홍렬 부장님이 내게 이런 화두를 던졌다. 공인의 입장에서 늘 이런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대답할 수 있는 모범답안을 마련해두어야
하건만 평소 그런 쪽에 그다지 용의주도하지 못한 성격 탓에 원고청탁만 받으면 쩔쩔매곤 한다. ‘그래, 내가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였을까?’ 집사람과 만나 감성적 교감을 나누고 결혼에 골인했을 때, 첫아들 민제를 얻었을 때, 두 딸 윤선이와
승희를 얻었을 때, 유일한 제자 창호가 기대이상으로 빨리 성장했을 때 등등 기쁨의 순간들은 많
았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간 조훈현의 기쁨보다는 프로기사 조훈현의 공적(公的) 기쁨을 밝히는 게 기획의도에
맞으리라.
글을 깨우치기 이전에 바둑부터 배운 나는 아홉 살에 프로로 입단하여 지금까지 수천 판의 크고 작은
승부를 겪어왔다. 운명적으로 승부사의 길을 걸어온 까닭에 내 인생의 희노애락에 대한 그래프는 아무래도 전적(戰績)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본기원에서 기록한 승수(勝數)까지 포함하면 대략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1,500승 쯤 올렸고, 150여
회의 타이틀 획득을 기록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한판은 역시 1989년 제1회 응창기배 세계
바둑대회 결승전 5번기 5국일 수밖에 없다. 웬만한 바둑팬들이라면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80년대까지 국제 바둑계는 일본이 거의
종주국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5년부터 중일 수퍼대항전이 펼쳐지면서 철의 수문장 섭위평이 일본의 최고수들을 연파하면서
비로소 일본의 독점시대가 점차 무너지게 되는데- 이런 시류에 고무된 대만의 재벌 응창기씨가 오랜 연구 끝에 사상초유의 국제대회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우승상금으로 40만불을 내건 세계바둑대회. 응씨의 호방한 스케일 이면에는 두 가지 계산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응씨 전만법으로 일컬어지는 자신의 바둑 룰을 보급하려는 의도와 섭위평, 임해봉 등의 중국인
기사들을 통해 한족(漢族)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 무렵 섭위평은 일본기사들한테 별로 져본 적이 없는 동방불패의 수문장이었고 임해봉은
명인위에 등극, 절정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회가 개최되고 각국별 엔트리가 발표되었을 때 우리는 퍽이나 자존심이 상했었다. 한국인은 나와 조치훈 두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치훈은 일본기원 소속이었으니 한국대표는 나 한 사람에 불과했다. 여러모로 불편한 심기였지만 대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오기와 승부욕이 가슴 한구석에서 들끓어 올랐다. 8강전에서 맞붙은 고바야시와의 대국이 최대 고비였다. 불과 두어 달 전 후지쓰배 1차전에서 나에게 패점을 안겼던 장본인이 바로 고바야시. 의욕이 앞서다
보니 몇 차례 실족을 해서 필패의 바둑이 되고 말았는데 종반에 혼신의 흔들기 작전으로 기어이 역전을
이뤄내고 말았다. 4강전은 서울에서 열렸다. 주인공들은 나와 섭위평, 임해봉, 후지사와- 이 때까지만 해도 주최 측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강자들이 고맙게도 다 떨어졌으니 결승전은 보나마나 중국인들의 독무대가 될 것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지사와 선생(그는 유학시절 실질적으로 나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이었다.)은 서울에
와서 이런 장담을 했다. “결승전은 너와 내가 만난다. 그 때는 양보가 있을 수 없지. 서로 최선을 다 하자.”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그는 기성 위를 쥐고 흔들었던 괴력의 소유자로 큰 바둑에 강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는 섭위평에게 두 번 연속 반집패를 당하고 말았고, 나는 임해봉을 2:0으로 물리
치고 결승에 올랐다.
[중국에서 열린 결승전]
당시만 해도 폐쇄사회였던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험했다. 홍콩을 통해 항주까지 가는데 교통편도 까다로웠고 의식주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바둑에 대한 중국인
들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인파가 모여들어 나는 폭동이라도 일어난 줄 알고 당황했었다. 주최 측은 결승 5번기를 전부 중국에서 개최할 심산이었는데 우리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쳐 세 판으로
줄였다. 섭위평과의 운명적 대결- 그와 공식적인 대결은 없었지만 LA에서 친선으로 두어본 적은 있었다. 두텁고 노림이 강한 바둑의 소유자였다. 첫판은 별 부담 없이 내 스타일의 빠른 행마를 구사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서울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결승까지는 어찌 올라갔어도 적지에 들어가 세 판을 두는 응창기배 대회를 한국의 언론들은 미리
포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어 벌어진 2,3국에서 나는 그다지 실력발휘를 해보지도 못하고 섭위평에게 밀려버렸다.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변명같지만 항주와 영파에서 머물렀던 2주일은 정말 지옥과도
다름없었다. 안전 문제 때문에 해가 저물면 바깥에 나갈 수도 없었고, 어쩌다 외출하더라도 기관원이 따라 붙어 몹시
부자유스러웠다. 기름기 투성이인 음식은 보기만 해도 넌덜머리가 났으며 후덥지근한 날씨는 또 얼마나 숨이 막혔던지...... 1:2로 밀린 상태에서 나머지 4,5국은 제3국인 싱가폴에서 펼쳐졌다. 싱가폴도 화교국가라서 우리에게는 적지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족에게 우승컵을 안기고야 말겠다는 주최 측의 선택이었지만 나는 싱가폴의 분위기
가 어쩐지 산뜻했다. 현대식 시가지도 상쾌했고 남국의 정취도 기분이 좋았다. 호텔에서 운기조식을 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이제 막판이다. 승부에서 지고 싶은 기사는 없겠지만 나는 죽어도 꼭 우승을 하고 싶었다. 상금 40만불과 승리를 맞바꿔서라도 이기고 싶었다. 싱가폴에서 재회한 섭위평의 얼굴은 납빛으로 굳어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 나는 승리를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바둑은 표정처럼 굳어 있어 상대하기가 편했다. 나의 흑번. 응씨배는 덤이 많아 백번이 다소 유리한 편이었다. 발빠른 포석으로 조금 앞섰다 싶었는데 중반에 계가를 해보니 뜻밖에도 덤을 내기 어려운 형세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중앙에서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는데 의외로 섭위평이 고분고분하게 응수
해주었다. 그 바람에 승기를 잡아 끝까지 밀어버렸다. 4국을 이겨 2:2- 마지막 5국에서 섭위평은 더욱 창백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심장질환을 앓고 있어 산소마스크까지 준비했다니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닌데다 큰 승부에 대한 부담
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마지막 5국. 돌을 가렸는데 또 흑번이었다.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나는 철저한 실리전법(고바야시류)을 택했다. 큰 승부에서는 역시 단단하게 집을 차지해놓고 나서 적진의 세력 안으로 뛰어들어 타개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싶었다. 그 작전이 주효했는지 섭위평은 자꾸 승부를 서두르다 마침내 자폭했다. 1989년 9월 5일. 그 한판의 승부는 세계바둑계의 판도를 일거에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섭위평이 돌을 던진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내 몫은 다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여지껏 존재해 온 것이 아니었을까? 4국 이후에 한국의 언론들이 싱가폴에 몰려와 5국의 승전 현장을 집중취재했었다. 펑펑 터지는 카메라의 조명을 받으며 나는 아낌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청난 상처를 입은 섭위평에게는 같은 승부사의 입장에서 미안하기 짝이 없었지만......한국바둑의
진정한 힘을 국제무대에서 후련하게 과시한 기쁨을 억지로 억누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승을 확인한 순간 상쾌한 피로감이 전신을 적셔왔다. 이제 국제무대에서 홀대받아 왔던 한국바둑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리라. 우승상금 40만 불과 커다란 컵을 안고 귀국하자 국민들의 환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김포에서부터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했고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까지 받았었으니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뤄낸 제1회 응씨배 우승은 조훈현 개인을 떠나 우리 바둑인과 국민 전체의 기쁨
이었던 것이다. 그 날의 기쁨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의 회로 저 깊숙한 자리에 오래도록 저장되어 힘들 때마다 은밀하게
꺼내 되새겨 보는 항생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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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며 두근두근......
almost~ my typ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