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star]

윌리엄 헤밀턴 쇼 (서위렴)

윈터원더랜드 2010. 5. 26. 11:17

불멸의 한국사랑 ‘서위렴’을 아세요?
한국이름 쓴 미 선교사 아들…‘한국전 순직’ 추모공원 조성

 

 

 

 

6.25 전쟁 시 자진 참전해 인천상륙작전에 합류했으며 임무를 마친 후 또 미해병대에 자원해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으나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서 저격당해 29세 나이로 숨졌다.

윌리엄 헤밀턴 쇼 대위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서위렴1세(WILLIAM E.SHAW) 의 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으며 1945년에는(세계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미국 해군 중위로 제대했다.

하버드대학교 철학박사 과정 수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제2의 조국을 외면할 수 없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경구절에 따라 마음을 굳히고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부모에게 "아버지,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시에 간다는 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부인과 아들 또한 이화여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손녀는 주한 미군 공군 장교로 복무하는 등 대를 이어 한국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녹번동 153-1호 일대에 추모공원을 건립중이다.

 

-2010.5.26 은평구소식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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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당시 평양에 머물던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쇼 1세와 부인인 애들린 사이에서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아버지의 영어 이름과 함께 서위렴(사진)이라는 한국 이름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소년은 미국 오하이오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다. 대학 졸업 뒤 해군에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그에게 한국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고심 끝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경 말씀을 따라 미국 해군 대위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측근 보좌관으로 활약했고, 이후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서울 입성 약 1주일을 앞두고 그는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6년 뒤인 1956년 9월 22일, 그의 친지 등이 성금을 모아 그가 쓰러진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건립했다. 그의 부인인 후아니타 로빈슨은 그때 두 아들을 데리고 아예 서울로 와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면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사회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남편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의 한 자리를 이미 예약해 놓았다.

한국과 그 가족의 특별한 인연은 3대째 이어졌다. 그의 큰아들 로빈슨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학 박사로, 며느리 캐럴은 한국 근대사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그의 행적은 잊혀져 있다. 그의 추모비도 어느새 옮겨져서 은평구 응암동 85-41, 응암어린이공원 마당의 구석에 쓸쓸히 서 있다.

3대에 걸친 윌리엄 가족의 한국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최근 은평구가 추모공원 건립에 나섰다. 은평구는 녹번동 153-1번지 일대 5700㎡ 터에 350억원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구는 이곳에 추모비를 옮겨 오고, 수변 공간, 휴게시설 등을 만들어서 잊혀진 이름을 시민들이 기억하도록 할 계획이다. 공원은 한국전쟁 60돌을 맞는 2010년 6월에 완공된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사진 은평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