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on]

펌]문유님의 글

윈터원더랜드 2009. 5. 16. 22:58


(토토로 개봉 당시 썼던 글이에요)

일요일, 모처럼 승이(우리 딸)와 함께 영화를 봤어.

<이웃집 토토로>였는데, 옛날 해적판 비디오로 보던 것과는
정말 감흥이 천지차이더구나.
그 섬세한 풍경화같은 질감은,
영화 필름으로서만 (아님 DVD쯤 되거나) 제대로
전해질 수 있는 물건이었거든. 특히, 손을 넣으면 시릴 것 같은
깨끗한 시냇물의 시각적 촉감이라니.

승이는 내내 즐거워했지만,
나는 잠깐 뭔가가 궁금해져 버렸어.
토토로가 내게 자아내는 정서란,
아무리 생각해도 향수와 비슷한 것이거든.
틀림없이 내가 경험했던 어린 시절,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떤 순수했던,
더 아름다왔던 세상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하지만 승이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이 노스탤직한 만화는 혹시 승이에게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판타지 월드같은 느낌은 아닐까?
내게는 언젠가 체험해보았던 리얼리티의 환기로 느껴지는 표현들이,
승이에게는 유토피아적인 판타지로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그러니까,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야 끽끽 대다
결국은 콸콸 찬물을 내뿜는 펌프도,
아침에 "사츠키, 학교 가자"하고 밖에서 불러대는 친구도,
손을 넣으면 아리도록 시릴 것 같은 차가운 냇물도,
또 채송화 씨앗을 심어놓고 싹트기를 기다리던 마음도,
밤이면 어쩐지 부우, 부우, 누군가 불어대는
뿔나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사스락거리며 천지가 온통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시골의 묘한 느낌들도,
나로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틀림없이 어디선가 경험해 보았던 것들인데,
그래서 어쩐지 아릿하게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본능과
감정선을 자극하는데,
그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 한없이 충실한 그 리얼리티가
내게는 참으로 감동적인데 말이야.

승이의 세대에게는, 이글거리는 눈을 한 고양이 버스는
어쩌면 <스타워즈>의 츄바카나 알투디투와 비슷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이웃집 토토로>가 하나의 판타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세상이 달라지고 세대가 갈라지는 건
바로 이런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고양이 버스의 리얼리즘이 판타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라면,
조금쯤 더 '끝'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섬뜩한 느낌이 쭈빗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우리의 무기력에 대한 서글픔이었을지도.

나와 승이는 어쩌면 아주 다른 세계를 살았기에,
이런 영화를 볼 때 절대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조금은 세대간의 단절에 벌써 좌절하기도 했다.

살아있는 자연과 호흡하는 어린 시절의 맛.
어떻게든 그런 느낌,
아주 짤막한 여행에서라도 꼭 맛보게 해주어야겠다고
다짐도 했지...이 세상을 깨끗하게 승이의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텐데...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에나 비슷해서
아이들 노는 것도 어찌 그리 똑 같은지
사츠키를 쫓아다니며 하는 대로 따라하는 메이가
요즘의 승이와 친동생같은 사촌동생 민지와 어찌나 똑같은지
참 많이 웃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작품이라면,
적어도 인간을 관찰하는 세밀한 시선과
그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근본을,
요즘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네.


# by 문유 | 2003-12-22 17:31 | 영화 |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