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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성균관 스캔들> - 뒤늦은 리뷰

윈터원더랜드 2010. 11. 16. 15:52
<성균관 스캔들> - 뒤늦은 리뷰 [15]

11월 11일.

남들은 빼빼로 데이라고 하는 날이, 내겐 좀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니

바로 입사기념일 이라는 것.

 

15년 전, 새내기 사원이었던 난

가부장적이고 권위의식 충만한 직장 분위기에 감히!! 불만을 가질 생각도 못했었다.

군대식 상명하달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게 불합리한 줄도 몰랐었다.

 

똑같이 어려운 입사시험 쳐서 남자들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음에도

여직원들은 언제나 남직원들의 서포터로서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잡일만 주어지는 현실이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드러내 내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남성들과 똑같은 업무를 맡기 시작했을 때도 여성이라는 핸디캡은 언제나 존재했다.

조직의 룰은 언제나 남성들만의 룰이었고, 여직원들이 직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여성들의 룰을 만드는 것이 아닌, 남성들의 룰을 습득하고 그 룰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것 뿐이었으므로...

 

15년의 직장생활 동안 어려울 때도 있었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동료들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었다.

드라마나 책을 보면서 펑펑 울 만큼 눈물이 많은 나이지만

"여자들이란..." "여자니까" 라는 식의 말은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었기에...

 

그래서 나는 여성임을 감추고 금녀의 구역인 성균관에 들어간 윤희에게서 내 자신을 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성들만의, 남성을 위한 룰이 지배하는 조직에서 내 자신의 여성성을 최대한 억제하고

남자들과 똑같아지려고 기를 쓰던 좀더 어린 날의 내 모습과

남장차림으로 남성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기를 쓰는 윤희가 닮아 보였다.

 

그러나 윤희와 달리 내 현실에선

나를 자극해서 한 단계 더 뛰어오를 수 있도록 끌어주는 동기도,

묵묵히 뒤에서 속깊게 지켜보며 어려울 때마다 말없이 도와주는 선배도,

혹은 위기의 순간마다 짠~ 하고 나타나는 수퍼맨 같은 선배도 없었다.

 

현실 속에서 선준이나 걸오, 여림은 무한경쟁에 내몰려 자기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겨워할 뿐이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또한 승진시기가 되면 서로 견제할 수밖에 없는 경쟁자들이기에

더이상 그들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할 수 없고

백마 탄 왕자님이나 흑기사가 될 수도 없다.

직장생활, 혹은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눈 파는 것을 허락치 않으니까.

그런 그들의 처지를 너무 잘 알기에

똑똑한 여자들 때문에 직장생활이 더 힘들어졌다고 투덜대는 남자들에게 때론 안쓰런 연민조차 느끼게 된다.

 

어쩌면 내게도 선준 같은 동기나, 걸오나 여림 같은 선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남녀평등의 시대에 역행하는, 나약한 생각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 지쳐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남자든 여자든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있기를, 누군가 내게 손내밀어 주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리고 드라마 속 선준이나 걸오, 여림은 그런 기대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들이기에

나는 더욱 그들에게 열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나도 안다.

그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 어려운 판타지일 뿐이란 걸.

하지만 현실이 삭막하고 힘겨울수록 판타지는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빛나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성균관스캔들>을 보는 내내 그 판타지 덕분에 많이 위로받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더이상 나는 현실에서 선준이나 걸오, 여림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영원히 내 마음 속 서러운 판타지일 것이고,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을 때만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이젠 알만한 나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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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입니다.

제 생각을 정확히 집어내기 어려워 허접한 리뷰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눈팅만 하는 게 미안해서 글을 올립니다.

적어도 아인존 랭킹에 작은 보탬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렵니다.